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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론과 천문학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20. 2. 1.

16세기 반에 서양에서 태양 심설을 지구 심설의 안으로 제시하며 시작된 천문학 분야의 개은 경험주의의 확산과 수리 과학의 발을 통해 형이상학을 뒤바꾸는 변으로 이어졌다. 서양의 우주론 이 되자 국에서는 국과 서양의 우주론을 회통하려는 시도가 전개되었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지 유산에 한 심이 제고되었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여 푸는 수학 통을 이어받은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운행을 단순하게 기술할 방법을 찾고자 하 고, 그것이 일으킬 형이상학 문제에는 별 심이 없었다. 고의 아리스토텔스와 톨마이오스는 우주의 심에 고정 되어 움직이지 않는 지구의 주를 달, 태양, 다른 행성들의 천구들과, 항성들이 붙어 있는 항성 천구가 회한다는 지구 심설 을 내세웠다. 그와 달리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우주의 심에 고정하고 그 주를 지구를 비롯한 행성들이 공하며 지구가 자하는 우주 모형을 만들었다.

 

 

그러자 톨마이오스보다 훨씬 적은 수의 원으로 행성들의 가시인 운동을 설명할 수 있었고 행성이 태양에서 멀수록 공 주기가 길어진다는 에서 단순성이 충족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스의 형이상학을 고수 하는 다수 지식인과 종교 지도자들은 그의 이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상계와 천상계를 성립시키는 아리스토텔스의 이분법 구도를 무뜨리고, 신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한갓 행성의 거주자로 락시키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16세기 후반에 라헤는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의 장은 인정 하면서도 아리스토텔스 형이상학과의 상충을 피하고자 우주의 심에 지구가 고정되어 있고, 달과 태양과 항성들은 지구 주를 공하며, 지구 외의 행성들은 태양주를 공하는 모형을 제안하다. 그러나 러는 우주의 수 질서를 신하는 형이상학인 신라톤주의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태양을 우주심에 배치하여 단순성을 추구한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받아들 다.

 

하지만 그는 경험주의자기에 라헤의 천체 측치를 활용하여 태양주를 공하는 행성의 운동 법칙들을 수립할 수 있었다. 우주의 단순성을 새롭게 보여 주는 이 법칙들은 아리스토텔스 형이상학을 더 이상 온존할 수 없게 만들었다. 17세기 후반에 뉴턴은 태양 심설을 역학으로 정당화 하다. 그는 만유인력 가설로부터 러의 행성 운동 법칙들 을 성공으로 연역했다. 이때 가정된 만유인력은 두 질*이 서로 당기는 힘으로, 그 크기는 두 질의 질량의 곱에 비례 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지구를 포함하는 천체들이 도가 균질하거나 구 칭*을 이루는 구라면 천체가 그 천체 밖 어떤 질을 당기는 만유인력은, 그 천체를 잘게 나 부피 요소들 각각이 그 천체 밖 어떤 질을 당기는 만유인력을 모두 더하여 구할 수 있다. 한 여기에서 지구 보다 질량이 큰 태양과 지구가 서로 당기는 만유인력이 서로 같음을 증명할 수 있다. 뉴턴은 이 원리를 용하여 달의 공 궤도와 사과의 낙하 운동 등에 한 실측값을 연역함으로써 만유인력의 실재를 입증하다.

 

 

 

16세기 말부터 국에 본격 유입된 서양 과학은, 청 왕조가 1644년 국의 역법(曆法)을 기반으로 서양 천문학 모델과 계산 법을 수용한 시헌력을 공식 채택함에 따라 그 상이 구체화되었다. 라헤와 러의 천문 이론을 차례로 수용하여 정확도를 높인 시헌력이 생활 리듬으로 자리 잡았지만, 국 지식인들은 서양 과학이 국의 지 유산에 히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효율이더라도 불온한 요소로 여겼다. 이에 따라 서양 과학 에 매료된 학자들도 어떤 방식으로든 서양 과학과 국 통 사이의 한 계 맺음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다. 17세기 웅명우와 방이지 등은 국 고 문헌에 수록된 우주론에 해서는 부정 태도를 견지하면서 성리학 기론(氣論)에 입각하여 실증인 서양 과학을 재해석한 독창 이론을 제시 하다. 수성과 성이 태양주를 회한다는 그들의 태양계 학설은 라헤의 향이었지만, 태양의 크기에 한 서양 천문학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기()와 빛을 결부하여 제시한 학 이론은 그들이 창안한 것이었다. 17세기 후반 왕석천과 매문정은 서양 과학의 향을 받아 경험 추론과 수학 계산을 통해 우주의 원리를 악하고자 하다. 그러면서 서양 과학의 우수한 면은 모두 국고에 이미 갖추어져 있던 것인데 웅명우 등이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성리학 같은 형이상학에 몰두했다고 비했다.

 

 

매문정은 고 문헌에 언된, 하늘이 땅의 네 모퉁이를 가릴 수 없을 것이라는 증자의 말을 땅이 둥다는 서양 이론과 연결하는 등 서양 과학 의 국 기원론을 뒷받침하다. 국 천문학을 심으로 서양 천문학을 회통하려는 매문정의 입장은 18세기를 기점으로 국의 공식 입장으로 채택되었으며, 이 입장은 국의 역 지식 성과물을 망라한 총서인 󰡔사고서󰡕 에 그로 반되었다. 이 총서의 편집자들은 고부터 당시까지 쏟아진 천문 련 문헌들을 정리하여 수록하다. 이와 같이 고 문헌에 담긴 우주론을 재해석하고 확인하려는 경향은 19세기 엽까지 주를 이루었다.